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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mocracy

제37회 5.18 민주화 운동 기념식에 대한 단상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기념식을 보며 만감이 교차합니다. 불과 몇 해 전 기념식과 비교하면 마치 천지가 개벽(開闢)한 것과 같은 광경을 목도하였기 때문입니다. 지난 몇 해 간의 기념식은, 5.18 상흔의 연장선 상에 있었습니다. 37년 전 광주시민에게 무자비한 총칼을 휘둘렀던 국가가, 또 다시 국민들에게 폭력을 가했습니다.


이번 5.18 기념식에 참여한 문재인 대통령은 희생자 유족에게 다가가 지그시 안아주었습니다. 수화통역사조차 눈물을 훔칠 수 밖에 없었던 이 뭉클한 장면, 생일이 곧 아버지의 기일이 되었기에 스스로의 존재를 때로는 부인하며 살 수 밖에 없었다고 고백하는 여성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모습은, 마치 그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당신은 희생자인 아버지가 이토록 귀하게 꽃 피운 존엄한 생명이라는 선언과 같이 느껴졌습니다. 그 장면은 국가의 폭력의 부당함 앞에서 오히려 정의로운 저항을 억압당해야만 했던 온 국민에 대한 위로의 메시지이기도 했습니다. 거짓 유가족을 앞에 두고 조문쇼를 펼쳤던 전직 대통령과는 달리, 예정에 없이 유가족의 뒤를 가만히 좇았던 문 대통령의 포옹은, 깊숙한 마음 속에서 진정으로 나오는 위로가 얼마나 거대한 힘을 갖는가를 입증해주었으며, 타인의 아픔에 함께 아파하며 공감하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공동체를 지탱하는 근원적인 힘이며,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으뜸가는 덕목임을 새삼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미국에서 살면서 지난 수 년 간 오바마 전 대통령의 명 연설은 한국 지도자들과 대조되는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2012년 재선에 성공하여 미국 독립선언문을 인용한 ‘모든 인간은 동등하게 창조되었다.(All men are created equal.)’라는 문구로 민주주의 사회를 위해 '인종차별 철폐'에서 한 차원 더 나아간 '성적지향의 차별 철폐'를 외쳤던 재선 성공 수락 연설, 도시의 흑인 교회에 한 백인청년의 총기난사에 의한 희생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하며 ‘Amazing Grace’를 불렀던 저 유명한 Charleston 추도 연설 등, 그의 연설에는 언제나 불평등의 철폐, 고통 문제의 해결, 파괴된 세상의 복원, 그리고 약자에 대한 사랑과 배려가 있었습니다. 그의 연설을 넋이 나간 사람처럼 듣다가 몰래 눈물을 훔쳤던 제가 이제는 당당히 한국의 지도자의 연설에 또다시 뜨겁게 공명할 수 있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큰 기쁨입니다.


문 대통령의 연설에 특히 공감이 되었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민주화 헌법 정신의 계승입니다. 
“광주정신을 헌법으로 계승하는 진정한 민주공화국 시대를 열겠습니다. 5.18 민주화 운동은 비로소 온 국민이 기억하고 배우는 자랑스러운 역사로 자리매김 될 것입니다.” 
헌법 전문에는 국가와 역사의 주인인 시민의 힘으로 이룩한 ‘3.1운동’과 ‘4.19민주이념’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5.18민주화 운동 또한 헌법 전문에 기록됨으로서,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의 초석이 되었던 그 저항정신은 입헌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 모든 법의 상위 규범이자 근본 원리이며, 구성원들의 공감대로 자리할 것입니다.


둘째 국가의 역할론, 그리고 우선순위에 대한 재정립입니다.
“국민의 생명과 사람의 존엄함을 하늘처럼 존중하겠습니다. 저는 그것이 국가의 존재가치라고 믿습니다.”
막스 베버는 ‘국가란 정당한 물리적 강제력의 독점을 관철시킨 유일한 공동체’라고 정의했습니다. 따라서 실질적으로는 국민의 대표인 정치 엘리트에 의해 움직이는 국가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를 지도자로 선출하여 그 강제력을 맡길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로 귀결이 됩니다. 그런데 문 대통령은 사뭇 다른 방향의 정의를 내립니다.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며, 물리적 강제력은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데 적극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올바른 기억과 역사의 복원입니다.
“헬기사격까지 포함하여 발포의 진상과 책임을 반드시 밝혀내겠습니다. 5·18 관련 자료의 폐기와 역사왜곡을 막겠습니다.”
역사는 유,무형의 형태로 존재하는 우리 모두의 자산입니다. 역사학자 카(E. H. Carr)가 이야기한대로, ‘역사란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입니다. 따라서 5.18의 올바른 기록을 갖는 것은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과 오늘날의 우리들이 시대정신을 계승하고 교류하며 소통한다는 의미입니다. 바른 역사를 가진다는 것은 또한 잘못된 역사가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는 온 국민의 다짐입니다.


넷째, 의로운 이들에 대한 위로와 명예 회복입니다. 
“저는 오월의 영령들과 함께 이들(전남대생 박관현, 노동자 표정두, 서울대생 조성만, 숭실대생 박래전)의 희생과 헌신을 헛되이 하지 않고 더 이상 서러운 죽음과 고난이 없는 대한민국으로 나아가겠습니다. 참이 거짓을 이기는 대한민국으로 나아가겠습니다.”
5.18의 아픔을 빗겨나간 80년대의 어느 날, 젊은 청년들이 타인의 부당한 죽음과 남겨진 이들의 고통을 알리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었습니다. 지금이라도 이들의 숭고한 이름을 기리고, 진실을 규명하여 이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해야할 것입니다.


기념식에 대한 수많은 기사 속에 한 기사를 발견하였습니다. 광주와 전라도를 지역기반으로 한 정당의 대선 후보였던 한 정치인이, 문 대통령의 연설동안 한 번도 박수를 치지 않았다는 내용입니다. 새정치를 추구한다면서 야당을 호남이라는 지역구도에 다시 가두었던 자신에 대한 통렬한 자기 반성일까요? 그 분이 우리나라의 대통령이 되지 않아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시 1980년에 태어난 저도 이제 5.18과 함께 나이를 먹었습니다. 퇴행이 아닌 희망과 완성의 길을 역사와 함께 걸어가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5.18 영령들의 명복을 빕니다.